인공지능(AI)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관심을 끌만한 대형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지만, 제대로된 기획과 투자가 첨가된다면 재미있는 실험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때다. 이미 개별로는 적용할 수 있는 AI 기술이 다양하게 나와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콘텐츠는 단순히 기술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창의력, 기획력 등이 큰 부분을 좌지우지하는 데다가, 기획자 혹은 크리에이터 본인의 끼나 잠재력 같은 능력도 무척 중요하므로 인풋-아웃풋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유튜브 등 플랫폼 자체의 알고리즘도 채널의 성패를 좌지우지 하므로 운도 어느 정도 따라야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채널에 AI를 도입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 투입이 전제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므로, 웬만해서는 투자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오션이다 뭐다해도 많은 이들이 콘텐츠 시장으로 향하는 데는 1) 성공 시 큰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2) 명성과 더불어 부가적인 효과를 누리기 때문이다. 앞으로 AI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대거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AI는 창의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AI는 인간의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지만, 감성이나 공감 등 능력이 필요한 영역은 가장 마지막에 정복될 것으로 전망됐다. 감성은 데이터로 쉽게 학습할 수 없기 때문인데, 엔터테인먼트 분야만큼은 AI가 당분간은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기반으로 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도 안전한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학습이 가능한 방법’으로는 지금 수준에서도 얼마든지 접근은 가능하다. 이를테면 전문가들은 20-30년 안에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본같은 것은 AI가 대신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특정 층이 좋아하는 ‘막장 드라마’를 예를 들면, 대본의 패턴을 수백가지로 분석해서 나열하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스토리를 AI가 뽑아낼 수 있다. 딥러닝 프로세스에 수많은 데이터와 신경망을 제공하면, AI는 빅데이터 분석 과정을 통해 일정한 패턴을 찾고, 그 패턴에 맞게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낸 베이스는 자연어 처리, 자연어 생성 기술을 통해 인간이 쓰는 언어 구조로 변환되어 매끄러운 형태로 도출되기도 한다. 시청률이 높았던 타이밍 등을 계산하여 타겟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씬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인간보다 오히려 AI가 훨씬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 AI가 구성한 콘티로 만든 Lexus ES TV광고 >
TV광고 같은 짧은 호흡의 콘텐츠를 AI가 만들어낸 사례는 이미 있다. 버거킹은 David Miami라는 대행사와 함께 머신러닝 기술을 통해 수백만개에 달하는 패스트푸드 광고와 마케팅 보고서를 분석하고, 발견된 패턴을 기반으로 여러개의 버거킹 광고를 제작한 바 있다.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의 크리에이티브는 대단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했기에 보기에 ‘평균적'이라는 평가다. 이어 IBM의 왓슨이 참여한 렉서스ES 광고 사례는 AI가 그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창의력 부분까지 어느정도 충족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결과물 또한 호평을 받았다. IBM 왓슨은 15년간 칸 페스티벌의 럭셔리 광고 부문에서 수상한 모든 광고의 비주얼, 오디오, 텍스트 및 스토리 전개 방식을 분석했다. (여기까지는 버거킹 사례와 비슷한 과정이다.) 이후 전문팀과의 협업을 통해 인간의 인지 및 감정적 요소를 분석한 알고리즘을 추가로 적용했는데, 어떤 요소가 소비자들의 감성적 반응을 도출하는 지 측정 도구를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최종적인 TV 광고 스토리라인은 어떤 장면으로 시작하고, 조명은 어떻게 제품을 비추는 지 등 상세한 설명이 기술돼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콘티를 만들고, 완성도 높은 한편의 광고를 만들어냈다. 이 렉서스 광고는 다소 실망(?)스러웠다는 평가를 받았던 버거킹 광고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앞으로 콘텐츠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도 AI가 활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다만 이 같은 AI의 활약은 ‘백 대본’ 정도의 역할이고, AI 자체가 콘텐츠 제작자나 크리에이터가 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AI 크리에이터라고 한다면, 적어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확실한 캐릭터가 반영되어야 하며, 시청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상인간 형태로 나마 말이다.
‘가상인간' 프로젝트, 어디까지?
“헤이 구글, 나 웃겨줘”
“개그 대방출. 사람은 그늘에 있으면 해피해진대요. 해를 피하니까 해피.. 파하하하하하 (배경 웃음소리)”
웃음이 피식나오는 이 대화는 구글 AI 스피커인 ‘구글 홈미니’와 방금 필자가 한 대화다. 개그맨처럼 배꼽잡게 웃긴 유머를 들려주는데, 오늘은 좀 피식만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풍부한 데이터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토킹이나 유머에 특화된 AI가 나온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이기는 하다. 다만 이런 단순한 대화만으로는 AI에 호감을 가지거나 팬심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우리가 90년대 사이버 가수 ‘아담’에게 열광하고, 자처하여 팬이 되었던 데는 그가 노래를 잘하는 것도 있지만 썩 잘생긴 외모 때문인 것도 있지 않나. 가끔 조악한 화면 안에서 팬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팬서비스로 윙크를 날려주는 것도 한몫했었다. 아담이 활약하던 1세대 시절을 넘어 현재 가상인간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 활발한 편이며 평균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뽐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 이케아의 모델로 발탁된 임마'Imma'>
얼마 전 가구전문회사 이케아가 발탁했다는 핑크 똑단발 헤어의 아시아계 모델이 화제가 된 적 있다. ‘임마(Imma)’라는 이름의 이 모델이 실제 사람이 아닌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된 ‘버추얼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케아 광고 속에서 임마는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모습, 실내 운동하는 모습 등을 보였는데 생김새도 실제 사람이지만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서 도무지 가상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임마는 이케아만을 위해 탄생한 버추얼 모델이 아닌 일본 CG전문회사가 제작한 것으로,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우수만 30만의 인플루언서다. 그러니까 이케아가 실제 기존에 활동하고 있는 인플루언서이자 버추얼 모델을 자사 모델로 기용한 특별한 케이스인 것. 임마와 유사한 버추얼 모델로는 ‘릴 미퀠라'가 있는데,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우수는 현재 270만명으로 웬만한 헐리우드 대형 스타급이라는 점이 놀랍다. 이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일반인이 업로드한 사진과 유사하지만, 훨씬 감각있는 컨셉의 예쁜 이미지들을 지속적으로 노출하면서 대중과 소통하여 대형 인플루언서가 된 케이스다. ‘이미지 속에 녹아든 가상인간의 이미지’가 인스타그래머들에게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실제 인간 유저들은 그녀들이 버추얼 모델이라는 점은 개의치않는 모습이며 여타 계정과 다를 바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있다. 가상인간도 얼마든지 연예인 급의 케릭터나 매력을 가질 수 있고 팬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을 버추얼 모델들은 증명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 인물이냐 가상이냐가 아니라, 팔로우하고 동경할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는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케아의 모델로 발탁된 버추얼 모델, Imma.
유튜브, 트위치 등 동영상 플랫폼에서 가상인간 프로젝트가 진행된 사례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16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버추얼 유튜버’를 들 수 있는데, 선두주자는 역시 일본의 ‘키즈나 아이'로 채널 구독자만 현재 285만명에 이를 정도의 빅스타다. 최근에 성장이 주춤하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막강한 애니메이션 덕질 문화를 중심으로 타겟층을 명확하게 공략하며 무럭무럭 성장해왔다. 현재 일본 내 활동 중인 버추얼 유튜버는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에서는 심지어 버추얼 유튜버 채널만 따로 순위를 매기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한 게임사가 운영하는 채널인 ‘세아 스토리'의 세아가 7만명 정도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세아를 비롯한 이 계열 대부분의 버추얼 유튜버는 ‘AI’를 ‘컨셉’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아가 발표한 컨셉은 무려 초-하이테크-신개념-오버테크놀로지-딥러닝-AI다. ‘하이테크’나 ‘신개념’, ‘오버테크놀로지’는 붙이기 나름인 단어들이고, ‘딥러닝이 가능한 AI’라는건 정체성의 표현이다. 사실은 컴퓨터그래픽(CG), 모션캡쳐 등 기술을 통해 케릭터를 화면 상에 구현하는 것이고, 뒷 단에서는 인간 연기자가 대본을 읽고 움직이는 것 뿐인데 가상의 공간, 가상의 인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다 보니 인공지능이 컨셉이 된 것이다.
키즈나아이의 A.I Channel
과거 버추얼유튜버는 참신한 주제와 현란한 편집기술을 통해 팬들을 현혹(?)시켰다면, 현재는 사람의 입담에 의존하며 라이브방송을 진행하는 ‘실황계’ 버추얼 유튜버가 대세가 되고 있다. 아무래도 기술적 비용, 인건비까지 유튜브 수익으로는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접근이 쉬운 실시간 방송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버추얼 모델, 유튜버의 콘텐츠는 AI 근처에 갔다고도 볼 수 없지만 본격적으로 AI 프로젝트가 반영된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이를 통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광고, 부가 케릭터 산업으로 발전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진다면 팬서비스 용도로 AI 관련 서비스 및 상품이 얼마든지 탄생할 수도 있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블랙미러’ 시즌 5의 ‘레이철, 잭, 애슐리 투' 편이 팝스타 애슐리O를 본따 만든 AI인형이 발매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처럼 말이다. AI인형이자 스피커는 인간과 활발한 소통이 가능하고 인간 친구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됐다.
AI 디지털 휴먼, 소통할 준비는 끝났다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AI크리에이터가 과연 탄생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여러 회사에서 내놓은 기술들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솔트룩스가 제시한 ‘디지털 휴먼’은 인공지능과 컴퓨터 비전, 자연어 처리(NLP) 및 음성기술을 결합하여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과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인간과 같이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실제 사람과 상호작용 할 수 있다. 이 회사는 올해 초 열린 세계 가전 전시회 ‘CES2020’에서 하이퍼센스(Hypersense)라는 회사와 협업하여 ‘버추얼 휴먼'을 선보였는데, 생동감있는 표정 연기가 가능한 가상인간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현역(?) 버추얼 크리에이터들은 실제 사람을 본따 이미지나 영상에 표현되고 있지만, 여전히 가상인간 특유의 건조한 표정을 자주 짓고 인간처럼 감정 표현이 미세하지는 않은 편이다. 하이퍼센스의 ‘리얼타임 페이셜 모션 캡쳐 기술’을 활용하면 인간의 수백만가지 표정을 그대로 가상의 캐릭터에 입혀 실시간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크리에이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례는 아니지만, 솔트룩스의 프로젝트 중 ‘AI 도널드 트럼프'는 유튜버, 트위터 등에 떠다니는 미국 도널드 대통령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실제와 같은 언어, 음성, 시각 지능을 제공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특정 인물, 크리에이터를 가상에 옮겨 구현할 수 있을 뿐더러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모델로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밖에 삼성전자 역시 가상인간 ‘네온'을 선보인 바 있는데 성별, 인종, 직업 등에 다양성을 부여하고 다양한 외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도록 해 확장성을 높였다. 실제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고, 감정을 분석하여 다양한 표정과 제스츄어도 취할 수 있다. 향후 딥러닝 기술을 통해 더 자연스러운 대답과 표정이 가능해진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AI크리에이터를 받아들일 때가 이미 왔을 수도
최근 유튜브 세계에서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무분별한 악플, 사생활 털기, 마녀사냥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피로도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얼굴을 드러낸 누군가가 대형 크리에이터가 되는 데는 리스크가 크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멀쩡한 사람도 콘텐츠 세계에서는 한낱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에 따른 반작용으로 최근에는 얼굴을 아예 공개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들이 덩달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가면이나 선글라스로 가리거나, 아예 카메라 구도 상으로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들이 늘어나고 있다. 얼굴을 가리다가 공개하는 게 아니라, 되려 얼굴을 공개하다가 가리는 유튜버 사례도 있다.
최근 대형 크리에이터로 빠르게 성장하는 사례를 보면, 처음부터 아예 회사가 붙어 철저한 기획하에 전략적으로 채널이 운영된다는 점을 미뤄볼 때 AI크리에이터가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AI크리에이터는 인간에게는 주머니 속 먼지같은 리스크가 전혀 없으며, 시청자들의 피로도마저 줄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너무 가까운 미래에는 탄생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뇌과학 분야 모 박사는 최근 쇼프로그램에 출연해 “조만간 학습기능을 갖춘 홀로그램화 된 인공지능이 쇼프로그램을 장악할 수 있다"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런 미래가 과연 올 수 있을지, 현재 진행되는 AI프로젝트를 머리에서 조합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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